세종대왕이 충북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에 행궁을 짓고 123일간 요양을 하면서 한글창제를 마무리 작업뿐만 아니라 조세법을 개정하고 양로연을 베풀었으며 청주향교에 책을 하사하는 등 조선의 르네상스를 실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청주시문화재단이 충청북도문화재전문위원 조혁연씨 등과 함께 세종대왕 초정행궁의 발자취를 연구조사 한 결과 밝혀졌다. 이에 따라 세종대왕이 초정행차를 하고 행궁을 짓게 된 배경, 어가행차의 노선, 당시 초정리 풍경, 초정행궁에서의 활동 내용 등의 궁금증이 상당부분 풀렸다.

▶안질, 소갈증 등 질병 치료를 위해 행궁 짓고 요양
세종이 안질, 소갈증, 욕창 등으로 고생을 하자 대신들이 초정약수를 추천하였으며, 세종은 1444년 2월에 내섬시윤(지금의 비서관) 김흔지를 통해 초정리에 행궁을 짓게 하고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세종행차를 하였다.


당시 한양에서부터 초정리까지의 거리는 280리였으며, 한양~영남대로~죽산~진천~초정의 노선을 5일에 걸쳐 어가 행렬을 통해 이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종 행차에는 세자(문종), 영흥대군(영웅대군), 안평대군도 동행했다. 특히 영흥대군은 당시 나이가 10살이며 8번째로 낳은 늦둥이였으며, 초정 행궁에서 한글실험을 보고 배웠을 뿐만 아니라 훗날 ‘명황계감(明皇誡鑑)’이라는 중국 고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세종이 초정리에 행궁을 짓고 머무른 기간은 두 번에 걸쳐 123일간(1차 3월 2일부터 5월 2일까지, 2차 7월 20일부터 9월 21일까지)으로 초정 약수를 마시고 씻는 등 치료를 하였다. 다만 초정리 행궁은 1448년 방화로 불에 타 없어지면서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으나 <신동국여지승람>등의 자료에 의하면 초정원 옆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초정약수터 주변으로 보고 있다.

▶약수가 하늘로 치솟고, 옥이 발견하는 등 태평성대로 불려
세종이 초정리에 행궁을 짓고 요양하던 조선시대에 크고 깊은 우물이 있었으며 ‘백수(栢樹)’라는 나무가 있었다. 백수는 잣나무 또는 측백나무로 추측되지만 현재는 우물만 남아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를 통해 우물이 돌로 쌓여 있는데 직경은 8척이고, 물은 푸른색이며, 아래로부터 위로 물방울이 크게 용출되었다고 기록했다. 약수는 마르지 않았으며 솟아오른 약수는 하천을 타고 길게 흘렀다고 기록했다.

또한 약수터 주변에는 38가구가 살고 있었고, 이 기간 중에 초정리에서 옥(玉)이 발견되었다. 세종은 옥이 발견된 곳을 특별 관리토록 지시했으며, 이곳의 옥은 세종대왕이 박연 등을 통해 악기를 개발하는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초정약수에서 물이 솟구쳐 오르고, 옥이 발견된 것을 보고 영의정 황희는 태평성대(太平聖代)라고 표현했다.

세종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초정을 다녀간 것으로 전해졌다. 세종 시절에는 신숙주, 최항, 황수신, 이사철, 이개 등의 대신들이 동행했으며, 이후 세조도 초정리를 방문했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실학자인 이규경, 일제 강점기에는 한글학자 최현배가 초정을 방문하는 등 많은 대신들과 학자들이 잇따라 초정리를 찾았다.

우의정 신개는 “초정약수의 맛은 세상에 존재하는 약수 중 단연 으뜸”이라고 말했으며, 예조판서 김종서는 “약수가 솟구치는 것은 상서로운 기운”이라고 했다. 또 신숙주는 “행궁에 봄이 늦더니 비오고 나서 맑게 개이자, 눈에 보이는 산천 그림으로 형용키 어렵다”며 초정행궁 풍경을 예찬했다.

특히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이론을 완성한 한글학자 최현배는 1932년 8월에 초정약수를 방문한 뒤 동아일보 지면에 <한글순례, 청주에서>라는 2회에 걸친 특별 기고를 통해 “세숫대야에 약수를 부어 두 눈을 씻으니 세종대왕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느낌”이라며 “세종께서 병환이었지만 초정으로 오셔서 오직 훈민정음 제작에 몰두하셨다”고 표현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中原鐵臣이 1921년에 초정약수 원탕 소유권을 매입한 뒤 탄산음료 제조공장을 세워 일본으로 보내는 등 일본인의 약탈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충북선이 개통되고 내수역이 생기면서 여름에는 초정약수 관광단 모집행사와 기차할인 행사가 전개돼 매년 전국 각지에서 수만 명이 방문하는 등 관광명소가 되었다.

▶한글창제 마무리, 용비어천가 배경, 조세법 등 조선 르네상스 펼쳐


행궁을 짓고 123일간 머물면서 세종은 한글창제를 마무리 하고 대신과 주민들에게 한글을 보급하는데 힘쓴 것으로 전해졌다. 세종은 한글창제 반대파였던 최만리 등을 유치장에 하루 동안 가두도록 명령할 정도로 한글창제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또한 1444년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고”의 샘이 초정리의 약수(우물)인 것으로 알려져 초정리의 약수와 자연환경이 세종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었다.

이와 함께 세종은 마을 주민들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고, 노인들을 초청해 양로연을 베풀었으며 청주향교에 통감훈의, 성리군서, 집성소학 등 책 9권을 하사하였다.

당시 중부지역에 가뭄이 계속되자 “청주목 백성들이 나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며 집집마다 벼 2섬을 무상으로 전달토록 하였으며, 어가 행차 중에 전답이 훼손된 농가에게는 쌀과 콩으로 보상토록 하는 등 어짊을 실천했다.

특히 세종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투표를 통해 조세법을 연분 9등법(풍흉)과 전분 6등법(토질)으로 개정키로 한 뒤 인근 청안현 등에 시범으로 도입하고 전국에 확대 보급했다.

당시 세종은 정인지 등을 청안으로 보내 시범 도입한 조세제도와 농작물 수확의 현황을 점검토록 하였으며, 이를 기준으로 전국에 시행토록 했다. 박연에게 편경을 만들어 시연토록 하는 등 조선의 르네상스를 직접 실천에 옮긴 것으로 밝혀졌다.

조혁연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은 “세종실록 등의 문헌을 통해 세종의 발자취를 조사한 결과 궁궐에서는 한글창제를 비롯한 다양한 정책을 연구했지만, 초정리 행궁 생활을 하면서 한글창제를 마무리하고 수많은 정책을 시범 운영토록 하는 등 조선의 르네상스를 실천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청주시문화재단 변광섭 문화예술부장은 “세종대왕이 초정행궁에서 펼쳤던 다양한 문화정책과 조선 및 근대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연구해 스토리텔링화 하고 콘텐츠 개발하는데 힘쓸 것”이라며 “한글, 한식, 한국음악 등 한국의 문화원형을 지역적 특성과 연계시켜 특화하는 등 문화융성시대를 이끌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 이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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