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쥐를 잡아먹고 살지만 늑대의 먹이가 된다. 늑대 또한 호랑이에겐 먹이에 불과하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번식력이 왕성한 쥐는 엄청나게 증가해서 동족끼리 잡아먹는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고양이에게 잡혀 먹는 것보다 더 비극적이다. 그래서 자연은 먹이사슬이라는 생태계를 만든 것이고, 이를 보고 사람들은 상생과 상극이라는 공식을 발견했던 것이다.

자연의 섭리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원칙 때문이다. 무엇보다 적대감을 갖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고양이가 쥐를 보면 본능적으로 미워지고, 잡아먹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도록 되어있다.

두 번째 특징은 상대를 잡아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만약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지 않고도 살 수가 있다면 잔인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자연은 철저한 종량제라는 점이다. 쥐 입장에서 보면 발톱 하나까지도 소중하지만 고양이 입장에서 보면 맛있는 먹이에 불과하다.


무엇하나 버리는 게 없을 정도로 철저한 종량제다. 이런 현상은 인간세상도 마찬가지다. 저축은행 비리를 은행감독원이 단속하고, 감독원의 문제는 감사원에서 감시한다. 그래도 걸러지지 않는 문제는 검경 등에서 수사를 통해서 제거한다.

만약 이런 일을 하지 못하면 은행은 동족끼리 잡아먹는 쥐처럼 스스로 파멸하고 만다. 요즘 은행의 비리를 감시하는 감독원이 뇌물을 받고 은행을 감싸는 일을 하고, 감독원의 문제를 적발해야하는 감사원이 감독원과 유착하는 현상이 벌어졌다고 난리다.


그 이유는 먹이사슬 구조가 깨졌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쥐를 볼 때처럼 적대감을 느껴야하는데, 뇌물 등으로 유착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먹이가 많다는 뜻이다.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는 것은 배가 부르다는 뜻이다.


금감원이 은행의 비리를 적발하지 못해도 직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구조가 문제다. 검찰이 저축은행 비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도 살기위해서다. 대검 중수부를 해체해야 한다는 여론을 불식시키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 먹이사슬 구조를 도입해야만 비리의 고리를 끊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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